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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기억한다는 말은 정말이다. 쓰면서 암기 하는 것이 더 오래 남는 이유.

최근 뇌과학의 발전에 따라 여러가지 검증된 내용들이 오고 있는 중에 뇌만 기억하는게 아니라는 실증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도롱뇽의 척수에 라디오파 검파기를 설치해서 움직일 때마다 뇌파를 입수했다.  도롱뇽이 움직일 때마다 나오는 뇌파의 패턴을 잡았다.  경사가 있던, 장애물이 있던 전진을 할 때의 뇌파는 같았다.  같은 뇌파로 여러가지 일을 한다는 것을 입증하기위해 도롱뇽의 척수 아래와 뇌 사이를 끊어서 신경을 전극에 연결 했다.  그리고 뇌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앞으로 전진할 때의 뇌파를 흘렸더니 도롱뇽은 앞으로 전진했다.  인간의 뇌 역시 많은 사고를 진행하기 때문에 아주 세세한 컨트롤을 뇌에서 주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릴 때와 성인 모두 걸어라 라는 뇌의 신호를 받지만 어릴 수록 잘 넘어진다.  넘어지지 않도록 세세한 조절은 각 관절등의 근육이나 세포들이 아닌가 하는 설이 신뢰가 가는 내용이다.  그리고 학습을 한세포들은 뇌가 걸어라 라는 메시지만 던져도 자기의 학습을 기반으로 적절하게 걷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왜 어릴때 잘 넘어지는지, 오랜 기간 걷지 않았던 성인도 제대로 걸을 수 없는지가 설명된다.  우리가 자주 얘기 하는 것이 자전거나 수영, 스키는 한 번 배우면 수십년이 지나도 몸이 따라준다는 말을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즉, 공부를 할 때 필기를 하는 습관은 뇌만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기억을 보조하게 되어 더욱 많은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필기 뿐 아니라 다양한 몸의 세포가 저장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운다면 더욱 기억력을 확장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giip :: Control all Robots and Devices! Free inter-RPA orchestration tool! https://giipasp.azurewebsites.net/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

요즘 들어서 일본으로 취업을 오는 사람들을 한국에서 취직하기 어려워서 도망쳐 오는 낙오자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조금 있는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게 요즘 한국 유투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한국이 일본을 눌렀다는 등의 표현을 많이 하고 한국의 급여가 일본보다 높다는 얘기를 많이 하고 있잖아요.  제 생각은 스타트 지점이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든 외국에 온다는 것은 실무에서 현지 언어를 쓸만큼 배워야 한다는 것이죠.  여기서 보통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그냥 부수적으로 배우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외국어를 배우고 나서 느끼는 점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지요.  위키페디아를 보면 한글 아티클이 621,854개 이다. (2023년1월 기준) 영어 아티클은 6,608,391개, 일본어는 1,359,611개 입니다.  내가 영어를 잘하게 된다면 한글로만 찾던 웹 문서의 10배 이상의 자료에서 찾을 수 있다는 얘기이죠. 일본어를 배우는 것 만으로 내가 얻을 수 있는 지식의 2배는 더 얻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제가 이 정보를 찾았던 2008년 전후에는 일본과 한국의 차이가 10배가 넘었는데 그래도 한국도 급속도로 정보를 공유하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는 것은 좋은 현상인 것 같습니다.   아뭏든 외국어를 알았다는 얘기는 어떤 나라를 가든 내가 조사할 일이 생겼을 때 그 만큼의 많은 양의 정보에서 검색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란 얘기죠.  이미 이 세상에 지식은 넘쳐나고, 그리고 번역기가 좋아서 많은 글을 번역 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언어를 아는 사람의 검색어와 번역기의 검색어는 다르기 때문에 결과가 달라집니다.  그 때문에 번역기가 발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까진 힘을 가지고 있지요. 뭐 근 미래에는 어떻게 될 지 모르겠지만...  다양한 문화를 접하게 되면 단지 두 배의 양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 가치관에 곱셈의 양의 생각이 만들어 집니다.  즉, 한국어를 알고 일본어를

소비자 구매패턴 맵(Consumer Journey Map)에 인공지능(AI)을 이용한 SEO기법

Consumer journey map(소비자 여행 지도) 이란 것이 있습니다. https://www.shoppersconfidential.com/customer-journey-mapping 사람들이 검색을 통해서 인터넷을 여행하는 목적을 나누어 유저의 패턴을 카테고라이징 하는 방법론 입니다. 업종마다 컨수머 저니 맵은 다르게 잡아야 합니다.  Decide > Travel > Experience > Return 으로 유저들의 단계에 따른 소비 방향이 있기도 하지만 Physical evidence > Customer actions > Onstage actions > Backstage actions > Supporting processes 로 나뉘기도 합니다. 그 밖에 Awareness > Consideration > Purchase > Onboarding > Advocacy 로 정의하는 곳도 있습니다.  이렇게 제품 및 서비스의 특성에 따른 유저의 행동패턴과 스텝이 달라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휴대폰을 사고 싶을 때 iPhone으로검색하는 사람은 iPhone을 사고자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경쟁사가 그 고객을 뺏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유투버용 휴대폰” 같은 식으로 특정 브랜드를 지칭하지 않는 단어들이 수천만 가지가 돌고 있지만 이들을 카테고라이즈 하지 않으면 구매하려는 고객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유저의 입력 키워드가 “휴대폰 동영상 편집 방법” 같은 Onboarding관련 키워드였다면 이미 구매를 지난 유저이기 때문에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실제 구매를 원하는 페이지라면 Consideration부터 접근을 해야하고, 미래 고객을 위해서 이미지 향상을 위한 홈페이지를 운영한다면 Awareness관련 키워드로 접근을 시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키워드를 어떻게 찾고 어떻게 넣어야 검색어의 상위에 올라갈 수 있을까요? 검색엔진은 보통 2주에 한 번씩 어뷰저를 막고 데이터 정리를

블록체인(가상화폐) 탈중앙화에 대한 잘못된 인식

가상화폐 에코시스템(생태계) 설계의 장에서 몇가지 이야기가 오갔다. 요즘 일본에서는 스테이블 코인의 알고리즘 트레이딩을 못하게 하는 움직임이 있다. 물론 모 토큰 때문에 일어난 이야기지만, 근본적인 철학은 없이 주변에 어떠니까 하는 이야기에 너무 흔들리는 느낌이 강하다. 탈중앙화가 된 근본원인은 중앙은행이 소비자를 속이면서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그걸 막기 위해 모든 트랜잭션을 공개하여 어느 누구도 속일 수 없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내가 만났던 모든 블록체인 (소위)전문가는 코인(토큰)의 가치 변화에 손을 대면 탈중앙화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 얘기를 듣고  그럼 거래소에서 몰래 장난질 치면서 조정하는 것은 이미 탈중앙화가 아니게 된 거 아닌가요? 라는 질문에 대답을 못하곤 한다. 내가 여기에 남긴 많은 글들은 한 단어의 뿌리에서 그게 어떤 의미로 해석을 해야 하고 어떻게 받아들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게 많다.  이번 내용 역시 나의 논리이지만 많은 곳에서 의견을 듣고 정리한 내용이다.  블록체인이 가져야 하는 탈중앙화는 1. 총발행량과 유통을 투명하게 해야 한다.  물론 이번에 문제가 생겼던 토큰역시 자체 네트워크에서 보면 볼 수 있었으나 거래소들이 발행자의 신고만 믿고 체크하지 못한 책임이 크다. 블록체인은 지갑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모든 거래가 투명하게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역추적하면 누구의 지갑인지 대충 알 수 있다. 따라서 발행한 토큰에 장난을 칠 수 없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2. 통화 안정을 위해서는 발행자가 책임을 가지고 관리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탈중앙화가 아니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탈중앙화는 기존 시중은행이 지켜야할 담보를 장난쳐서 소비자에게 피해를 가중시켜서 생긴 것이다. 그렇다고 연방준비은행이 통화 안정을 방관하지 않는다. 통화를 발행한 자는 책임을 지고 통화 안정에 힘을 써야 한다.  1/99까지 떨어진 토큰이라도 발행자가 그걸 다시 회수해주었다면 그렇게 떨어진 채가 아니지 않았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끝이 없는 상상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이 세상의 지식으로는 설명 할 수 없는 것에 도달한다. 나는 그것을 신의 지식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영원히 밝혀낼 수 없는 지식이니까.. 예를들면 죽음이후, 우주의끝, 시간여행 등이 있다. 한동안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적 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숨이 턱 막히고 답답해진다. 호흡곤란이 올것같은 두려움에 어느 순간부터 죽음에 대한 상상을 멈췄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삶에 대한 해방? 천국으로 가는 길? 나에게는 그저 '무' 라는 것을 만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사고할 수도, 감정을 느낄수도, 벗어날 수도, 극복할 수도, 심지어 죽을수도 살수도 없는 것.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서 없어지는것. 나는 이것이 너무 무섭고 해결 방법을 찾을수가 없다. 코즈믹 호러처럼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 좌절하고 두려움을 느낀다. 너무 아쉬울 것 같다. 세상은 변화, 발전중이고 얼마나 신기하고 새로운것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을 못본다는것이 너무 아쉽다. 한번 죽으면 끝이라는점. 인생을 한번만 살 수 있다는것도 너무 아쉽다. 두려움을 극복할 방법이 보이진 않지만  이 두려움을 이용해서 최대한으로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할 것 같다.

오토바이의 인식

주변 사람들과 오토바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되게 많은 사람들의 오토바이에 대한 인식이 안좋은걸 깨달았다. 확실한건 자동차보다 훨씬 안좋다는 것이다. 오토바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안좋은 이유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 --위험하다-- 당연히 운전자를 보호해주는 에어백, 자동차 뚜겅같은 것이라던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자동차에 비해 위험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고가 날 확률은 자동차보다 적다고 생각한다. 일단 차체 크기부터가 자동차보다 훨씬 작다. 사고가 날 면적이 배로 작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동차보다 유연하다. 즉, 사고를 피하기 쉽게 이리저리 방향을 틀거나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안전장비를 착용한 상태에서 법규를 지키며 운전하는 오토바이는 사고가 나더라도 목숨에 지장이 갈 정도의 사고는 거의 없다. 거기에 오토바이 탑승자는 오는 충격을 자신이 붕 뜸으로써 어느정도 흡수할 수 있다고(에어백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이 죽을정도의 사고라면 그것은 자동차든 오토바이든 죽는다. 또, 보통의 기사들이나 뉴스를 보면 오토바이 사고를 강조한다는것을 알아챘다. 자동차 사고들보다 오토바이 사고들에 위험하다는 수식어를 붙이고, 과장시키는 기사, 뉴스 등등 자동차보다 오토바이에 대해 더 폄하하는 이런 일들이 오토바이를 위험하다는 인식으로 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안전하게 운전하지 않은 자동차도 똑같이 위험하다. 그러므로 안전장비를 하고 안전하게 운전하는 오토바이는 전혀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날라리, 일진같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에 들었을땐 되게 황당했지만 어찌저찌 생각해 보니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폭주족, 일진(현실이나 소설, 웹툰, 만화 등)들은 거의 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 자동차를 탄 폭주족, 일진은 왠만해서는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인식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폭주족은 오토바이를 타고 위험하게 무리지어 다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교통법규를 잘 지키고 다니는

명문대가 위주인 대한민국 사회에 대한 생각

요즘 계속해서 대학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까 의문점이 생긴다. 우리나라의 대학 인식이 맞는걸까 예대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선 인문계의 경우를 먼저 말하려고 한다. 맞는 부분도 있다고는 생각한다.  대학의 결과가 그 사람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고, 성실했느냐 .. 이런 점은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것과 동떨어지고 먼 길인 공부를 꼭 해야 하느냐 라는 점이 맘에 걸린다. 자신의 목표가 뚜렷하지 않아서 일단 공부를 한다는 사람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목표가 생겨서 그 일을 하고 싶지만 대학 입시, 수능 이런 것들 때문에 수능을 잘 마치고 나서야 시작하기가 편하게 되었다는게 안타깝다고 생각한다. 대학을 건너뛰고(지잡대) 다른 일들을 하게 된다면 우리나라의 경우 많은 기업들이 대학을 보기 때문에 입문조차 쉽지 않은게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정부와 기업들의 미래에 대한 투자(유학, 강연, 지원 프로그램 등)가 거의 명문대에 몰려있다는 시스템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정들로 인하여 대학을 못가는 사람들도 있다. 형편이 안되거나,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제외하고는 잘 못하거나.. 이런 사람들의 가능성을 바라보기 힘든 시스템이라고도 생각한다. 예대의 경우는 실력에 따라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사람들과의 합(합주 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학을 갈 수 있는 형편이 된다면 가는게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술을 하고 싶지만 다른일도 동시에 하고싶은 사람들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할까 라는 생각이 또 든다. 이런 사람들의 스펙에는 예대밖에 없기 때문에 대학을 보는 우리나라에서는 기회를 얻는게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때문에 우리나라 기업도 외국 기업처럼 이 사람이 이 기업에 어느정도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보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공부에 목매다는 사회가 아닌 자신의 하고싶은 일을 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